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네르츠 (문단 편집) === 감독 생활 === 네르츠는 1924년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자신이 몸담았던 [[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]]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.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 독일에서 축구는 열등한 스포츠 취급을 받았고 축구팀의 전력도 [[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오스트리아]], [[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|헝가리]], [[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이탈리아]] 등 다른 유럽팀들에 비해 약했다. 당시 [[독일 축구 연맹]]의 회장 펠릭스 린네만은 독일을 세계적인 축구 강국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고 [[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|올림픽]]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집중했다. 그러면서 가장 먼저 대표팀에 전임 감독을 두는 것을 계획으로 잡았고 그 대상이 네르츠였다. 네르츠는 1926년 독일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였고 [[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|네덜란드]]와 치른 국가대표 감독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. 하지만 정작 올림픽에서는 남미의 강호이자 디펜딩 챔피언 [[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|우루과이]]를 만나 2라운드에서 1대4로 대패하였다. 네르츠는 이 패배에서 팀의 약점을 찾으려 노력했는데 당대 최강팀 [[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|잉글랜드]]를 주기적으로 관찰했고 하드 트레이닝도 도입했다. 그리고 [[에른스트 쿠초라]], [[프리츠 스체판]], [[파울 야네스]] 같은 새로운 피들도 수혈하였다.[* 하지만 쿠초라는 나중에 제대로 사고를 쳐서 1932년 이후로 네르츠의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. 자세한 이유는 [[에른스트 쿠초라#s-4|쿠초라 항목의 뒷이야기]] 참조.]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29년에는 5전 4승 1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. 그러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정치계에 큰 변화가 왔고, 네르츠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. 원래 네르츠는 [[독일 사회민주당]]을 지지하는 중도좌파의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. 하지만 네르츠는 1933년 무렵부터 [[SA]]에, 1937년에는 [[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|나치당]]에 가입하였다. 비록 생전에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퇴하면서 정치에는 무관심하다라는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유럽 스포츠계에서 [[유대인]]을 몰아내자는 반유대인 운동에도 참가하는 등 논란의 여지를 만들었다. 나치당은 대표팀을 [[파시즘]]의 선전에 이용하면서 독일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 했고, 그들의 목표는 이탈리아와 함께 [[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|이탈리아의 홈에서 열릴 월드컵]]을 나눠 먹는 것이 되었다. 그리고 독일 대표팀은 3위를 차지하면서 절반의 성공을 이뤄냈다. 다음 국제 대회인 [[1936 베를린 올림픽|올림픽]]을 준비하면서 독일 대표팀이 1935년의 A매치 17경기 중 13승을 거두자 나치당은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. 하지만 올림픽 본선에서 독일은 2라운드 상대 [[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|노르웨이]]에 일격을 맞으며 0대2로 패배하였고, 네르츠는 탈락의 책임을 떠맡은 채 해임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